1960년대 초반의 대한민국은 단 1년 사이에 민주혁명과 군사정변이라는 상반된 체제를 경험했습니다. 4·19 혁명은 시민의 힘으로 독재를 무너뜨린 민주주의의 상징이었고, 5·16 군사정변은 다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며 권위주의로 회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두 사건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닌, 대한민국 정치의 구조와 발전 방향을 결정한 중대한 분수령이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두 사건이 일어난 시대적 배경과 진행 과정, 그리고 오늘날에 남긴 역사적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4·19 혁명 — 시민의 분노가 일으킨 민주주의의 불꽃
1950년대 말, 이승만 정권은 장기 집권을 위해 헌법을 연이어 개정하며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1952년의 ‘발췌 개헌’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해 재선에 성공했고,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3선 제한을 없애며 장기 집권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 집중은 곧 부패와 정치 탄압으로 이어졌고, 국민의 불만은 점차 쌓여갔습니다. 결정적인 불씨는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제4대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재선을 위해 투표함 바꿔치기, 공무원 동원, 야당 참관인 축출 등 조직적인 부정을 자행했습니다. 부정선거 소식이 알려지자 마산에서 시작된 시민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특히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된 4월 11일 이후 분노는 걷잡을 수 없게 번졌습니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였고, 돌아가는 길에 경찰과 폭력배에게 습격당했습니다. 이 사건이 전국적인 저항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다음 날인 4월 19일, 서울과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독재 타도, 부정선거 다시 하라”를 외쳤습니다. 정부는 발포로 대응했지만,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자 여론은 완전히 이승만 정권에 등을 돌렸습니다. 미국 정부 또한 이승만의 하야를 종용했고, 결국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났습니다. 국민의 힘으로 권위를 무너뜨린 첫 민주혁명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습니다.
4·19 혁명 이후 — 제2공화국의 탄생과 한계
이승만 정부가 붕괴된 뒤, 대한민국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의원내각제 체제를 도입했습니다. 국회가 선출한 장면 총리가 정부를 이끌었고, 대통령의 권한은 상징적 수준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회복되었으며, 정당 활동이 다시 활발해졌습니다. 제2공화국은 민주주의 제도의 틀을 세우기 위한 중요한 실험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장면 내각은 정치 경험이 부족했고, 정당 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국정 운영이 불안했습니다. 경제 정책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고, 물가 상승과 실업 문제는 악화되었습니다. 북측의 군사 도발과 안보 불안이 겹치면서 국민의 신뢰도 점차 떨어졌습니다.
4·19 혁명은 국민이 독재를 무너뜨린 위대한 사건이었지만, 제2공화국은 이를 제도적으로 안정시키지 못했습니다. 사회 전반의 혼란 속에서 ‘민주주의보다 안정이 우선’이라는 인식이 퍼졌고, 이런 분위기가 군부 세력의 등장을 정당화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1년 후, 군인들은 스스로 ‘국가 재건’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정치 무대에 등장하게 됩니다.
5·16 군사정변 — 국가재건을 내세운 권위주의의 귀환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감행했습니다. 그들은 제2공화국의 무능과 부패, 경제 침체를 비판하며 ‘국가 구출’을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당시 서울 주요 기관—중앙청, 방송국, 국회의사당, 경찰청—이 신속히 점령되었고, 통신망과 교통이 통제되면서 내각은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윤보선 대통령은 실질적인 권한이 없었고, 장면 총리는 피신했습니다. 이로써 정변은 사실상 성공했고, 군부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조직해 행정·입법 권력을 모두 장악했습니다.
정변 세력은 ‘정치인 숙정’을 내세워 다수의 정치인을 체포하고 정당을 해산시켰습니다. 언론은 철저히 검열되었고, 정치 활동은 금지되었습니다. 이후 1963년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군사정권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시기 정부는 부정부패 척결을 내세웠지만, 동시에 권력 구조는 더욱 중앙집중적으로 변했습니다. 정치적 자유는 제한되었고, 사회 전반에 권위주의적 통제가 강화되었습니다.
5·16 이후의 변화 —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의 후퇴
박정희 정부는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제 성장을 국가 목표로 내세웠습니다. 1962년부터 시행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도로, 공장, 전력 등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수출 중심의 산업화 전략을 추진했습니다. 그 결과, 1960년대 후반부터 한국은 빠른 성장세를 보이며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정도의 성과를 냈습니다. 농촌의 생활 개선을 위한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포항제철·현대조선소 등 주요 산업시설이 건설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철저한 국가 주도의 통제 속에서 이루어졌고, 정치적 자유와 인권은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1972년, 박정희 정부는 ‘국가 안보와 경제 성장’을 이유로 유신헌법을 제정했습니다. 이 헌법은 대통령에게 종신 집권의 길을 열어주었고, 국회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켰습니다. 반정부 인사와 언론인들은 탄압을 받았고, 국민의 정치 참여는 더욱 제약되었습니다. 이로써 5·16 군사정변으로 시작된 군사정권은 단기적인 안정과 경제 성장이라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민주주의의 후퇴와 인권 억압이라는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이 남긴 교훈
1960년대 초의 두 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정치를 양분하는 두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4·19 혁명은 국민이 주권의 주체임을 증명한 민주주의의 출발점이었고, 5·16 군사정변은 국가 발전을 명분으로 한 권위주의의 부활이었습니다. 두 사건은 방향은 달랐지만, 모두 ‘혼란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으려는 시대의 선택’이었습니다. 4·19의 정신은 이후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으며, 5·16의 경제개발 정책은 오늘날 산업화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결국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이 두 사건의 충돌과 균형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정치적 자유와 경제 발전은 서로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와 경제 번영은 이 역사적 경험의 연속선 위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