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수많은 도시들 사이에서도,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역사를 이어온 장소가 있다. 바로 ‘산 카르로(San Carlo)’다. 이 글에서는 산 카르로가 어떻게 탄생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앞으로 이 도시가 지닌 잠재력과 발전 가능성에 대해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1. 탄생하지 못한 이상향: 산 카르로의 기획과 시작
산 카르로는 20세기 중반,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역에 건설될 계획이었던 이상적인 도시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수도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도시 집중 현상이 극심해졌고, 이에 따라 새로운 거주지 개발이 필연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산 카르로는 바로 이런 도시 팽창과 인구 재분산을 위한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다. 이 도시는 철저하게 계획된 형태로, 공업지대와 주거지, 상업지구가 조화를 이루는 ‘기능주의 도시’로 설계되었으며, 자전거 도로와 녹지 공간, 공공 인프라가 완비된 모델 도시를 표방했다.
산 카르로는 1958년 정부 산하 도시계획국의 주도 아래 시작되었다. 초기 투자금은 북부 산업자본의 지원과 유럽개발은행의 융자에 의해 마련되었으며, 약 3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중소형 도시로 설계되었다. 당시의 도시계획안에는 직선형 도로망, 중앙광장 중심의 방사형 건물 배치, 학교와 병원 등의 공공시설이 포함되었으며, 심지어 유토피아적 철학을 반영한 ‘커뮤니티센터’와 ‘예술문화 단지’도 구상되었다.
그러나 산 카르로의 탄생은 시작부터 암초를 만났다. 지방 정부와 중앙 정부 간의 행정권 충돌, 부동산 세력과의 갈등, 경제 불황 등의 요인이 맞물리며 주요 건축 공정이 몇 차례 중단되었고, 결국 초기 개발 단계에서 도시 전체의 30%만이 완공된 상태로 방치되었다. 그나마 완공된 부분도 대부분 임시 거주용 건물로 기능했으며, 주민 유입도 저조해 ‘유령 도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 속에서 태동한 산 카르로는, 미완성 도시라는 정체성 안에 잠재적 스토리와 아쉬움을 간직하게 되었다.
2. 멈춰버린 시간: 산 카르로의 현재 모습
현재의 산 카르로는 외부 방문객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심지어 이탈리아 내에서도 지역 주민 외에는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구글 지도상에서는 ‘산 카르로’라는 이름이 존재하긴 하지만, 항공사진을 확대해 보면 전체 구역의 절반 이상이 개발되지 않은 채 들판으로 남아 있다. 남아 있는 건물은 대부분 1960~70년대 양식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지금은 일부만이 사람의 손길을 유지한 채 사용 중이다.
도시의 중심부에는 한때 커뮤니티 광장으로 계획되었던 넓은 공간이 있다. 이곳은 지금은 잡초로 뒤덮인 빈 공간이지만, 여전히 광장을 둘러싼 반원형 건물의 외벽과 벽화에서 당대의 이상주의적 디자인을 엿볼 수 있다. 과거 유치원으로 사용되었던 단층 건물은 지금은 폐허처럼 보이지만, 내부에는 아직도 벽화와 낙서, 철제 놀이기구가 남아 있어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현재 산 카르로에 실제 거주 중인 인구는 200명 남짓이다. 이들 대부분은 지역 농업에 종사하거나 주변 소도시로 출퇴근하는 이들로, 자발적 공동체를 형성해 살아가고 있다. 도시는 공식적으로는 행정구역 내의 ‘계획 미완성 구역’으로 분류되어 있고, 쓰레기 수거나 도로 보수 등 기본적인 시 서비스도 간헐적으로만 제공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산 카르로는 서서히 예술가들과 도시 연구자들 사이에서 흥미로운 장소로 떠오르고 있다. 과거와 미래, 실현되지 못한 이상이 공존하는 장소로서, 이 도시는 마치 건축적 유물처럼 기능하며 묘한 매력을 자아낸다.
3. 죽은 도시 속 생명의 움직임: 산 카르로의 재발견
최근 몇 년간 산 카르로는 새로운 의미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도시 연구자들과 건축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미완성의 유산(Unfinished Legacy)’이라는 개념으로 이 도시를 조명하고 있으며, 일부 예술인들은 이곳을 ‘현대 유령 도시의 캔버스’로 삼아 전시와 설치미술을 기획하고 있다. 2022년에는 밀라노 출신의 젊은 작가들이 이곳에서 단편영화 촬영을 진행했으며, 이는 베니스 단편영화제에서 상영되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탈리아 문화유산청은 산 카르로의 일부 건축물을 ‘현대건축 보존 대상’으로 지정했으며, 학문적 차원에서 이 도시의 미완성과 유산성을 동시에 탐색하고 있다. 또한 비영리단체 ‘Città Fantasma(유령도시)’는 지역 주민들과 협력하여 abandoned city tour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으며, 방문객들에게는 과거 도시 계획 문서와 건축 설계도를 기반으로 당시의 도시 비전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도시의 발전 방향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은 바로 ‘공공성과 문화적 재해석’에 있다. 단순히 재개발을 통한 상업화가 아닌, 그 실패의 역사 자체를 존중하며 도시를 하나의 역사적 실험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산 카르로는 과거 실패의 흔적이 아닌, 새로운 문화·도시 실험의 장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최근에는 친환경 도시 실험지로의 활용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에너지 자립형 건물, 커뮤니티 농업, 저탄소 거주 모델 등의 시범 사업을 산 카르로에서 실험할 수 있다는 의견이 학계와 정부 간 논의 테이블에 오르기 시작했다. 죽은 도시라 여겨졌던 이곳에서, 이제는 생명의 조짐이 조금씩 꿈틀대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4. 유령 도시에서 미래 도시로: 산 카르로의 내일
산 카르로의 발전 방향은 과거의 교훈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까지 이 도시는 ‘이상주의적 도시 개발의 실패’라는 레이블 아래 방치되어 왔지만, 이를 단순한 실패로 치부하기보다는 미래 도시 모델의 가능성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도시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로운 상상과 실험이 가능한 유연한 공간이라는 점이다.
현재 이탈리아 정부는 산 카르로를 포함한 미완성 계획 도시들을 모아 ‘도시계획 유산 재생 프로젝트’를 기획 중이며, 이 프로젝트는 유럽연합의 지원을 받아 2030년까지 점진적 재활용과 재생을 목표로 한다. 산 카르로는 이 프로젝트의 파일럿 도시로 지정되어 있으며, 건축학·사회학·생태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마스터플랜 수립에 참여 중이다.
미래의 산 카르로는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닌, 실험적 도시 연구소, 예술 창작촌, 교육 허브 등 다양한 기능을 통합하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거듭날 전망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주민 중심의 운영 체계를 계획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역 주민들은 도시의 기본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게 되며, 소규모 협동조합 형태의 거버넌스를 통해 자율적 운영이 가능하도록 설계되고 있다.
산 카르로는 이제 단순히 ‘유령 도시’가 아닌, ‘가능성의 도시’로 탈바꿈할 준비를 하고 있다. 실패의 역사 위에 미래의 씨앗을 심는 이 실험이 어떤 결실을 맺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도시가 단 한 번도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시간 속에 멈춘 듯한 이 장소는 이제 새로운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