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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테르세라: 가뭄과 고립의 도시

by 옥돌v 2025. 4. 7.

스페인 중부 내륙, 메세타 고원의 한가운데 자리한 ‘테르세라(Tercera)’는 과거 농업의 중심지였으나 지금은 점점 지도에서 사라져가는 도시다. 지속된 가뭄과 경제적 고립 속에서 이 도시는 서서히 숨을 죽였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회복과 재생의 가능성이 꿈틀대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테르세라의 탄생 배경, 현재의 모습, 그리고 미래를 향한 도전까지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스페인의 테르세라: 가뭄과 고립의 도시
스페인의 테르세라: 가뭄과 고립의 도시

1. 물이 사라진 땅에서 피어난 도시: 테르세라의 시작

테르세라는 19세기 중반, 스페인의 농업혁신이 한창이던 시기에 형성된 계획 농촌 도시다. 이 지역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밀과 보리의 재배지로 사용되어 왔으며, 중세에는 영주들의 관개 농업 중심지로 기능해 왔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도시 테르세라가 구체적으로 모습을 갖춘 것은 1852년, 이사벨 2세 정부의 농촌개발 정책에 따라 이뤄진 대규모 개간사업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스페인 정부는 수도 마드리드의 인구 과밀 문제를 해결하고 식량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중앙 내륙 지역에 소규모 자치 농업 도시를 여럿 건설했으며, 테르세라는 그 중에서도 가장 야심차고 구조화된 모델 도시로 계획되었다.

테르세라는 건설 당시부터 자급자족이 가능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중심 광장을 중심으로 행정청, 종교시설, 시장, 학교가 배치되었고, 그 외곽을 둘러싼 형태로 농업용 토지와 주거지가 구성되었다. 관개를 위해 인근의 테흐르 강에서 유입된 물을 기반으로 하는 저수지와 수로망이 촘촘히 이어졌으며,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앞선 농업 기술과 물 관리 체계를 도입하였다. 이러한 계획적 구성이 가능했던 이유는, 테르세라가 단순히 마을이 아닌 ‘지속 가능한 도시’로서의 실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르세라의 시작은 이상적이었으나, 자연의 불확실성을 간과했다. 20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지구 온난화의 징후가 이 지역에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1970년대에 들어서는 강우량이 급격히 감소하며 저수지의 수위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농업 생산량은 줄었고, 물 부족으로 인해 축산업도 쇠퇴하면서 도시 경제는 점차 침체되기 시작했다. 정부의 추가적인 지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고, 테르세라는 그렇게 ‘물이 사라진 이상향’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천천히 쇠락해갔다.

 

2. 가뭄과 고립 속의 오늘: 현재의 테르세라

2025년 현재, 테르세라는 공식적으로는 ‘거주지 지속 불가 권고 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실질 거주 인구는 500명을 밑돌며, 이 중 상당수는 노년층이거나 생계보다 고향에 대한 애착으로 머무는 이들이다. 과거 3000명 이상이 살던 번성한 농업 마을의 흔적은 시청, 폐허가 된 시장, 버려진 농기계 등에서 간신히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가장 큰 문제는 물 부족이다. 테흐르 강은 수위가 1980년대 대비 60% 가까이 줄었고, 그나마 남은 저수지마저 매년 여름이 되면 바닥을 드러내기 일쑤다. 이로 인해 상수도 공급은 불규칙하게 이루어지며, 주민들은 빗물 저장 시스템과 외부 식수 트럭에 의존해 생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기본적인 위생과 의료에도 영향을 끼치며, 젊은 층이 정착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

고립 역시 심화되고 있다. 테르세라에는 더 이상 정기적인 버스 노선이 운행되지 않으며, 가장 가까운 철도역은 40km 떨어진 외곽 도시 카르데나스에 위치해 있다. 인터넷과 통신 인프라도 낙후되어 있어, 외부와의 연결이 사실상 단절된 상태다. 이 같은 상황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서, 교육 기회의 상실과 지역 경제 고립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테르세라는 나름의 방식으로 생존을 이어가고 있다. 일부 주민들은 소규모 비영리 협동조합을 만들어 유기농 작물 재배를 시도하고 있고, 폐가를 리모델링해 친환경 숙소로 바꾸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더불어 기후 변화 문제에 관심이 있는 국내외 연구자들이 이곳을 ‘기후 실험지’로 주목하면서, 테르세라는 천천히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3. 되살리기 위한 시도들: 테르세라의 가능성

테르세라의 재생은 ‘자연의 회복’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대신 이곳에서는 몇몇 창의적인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2021년부터는 스페인 환경부와 유럽연합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건조지역 재생 프로젝트’의 파일럿 대상지로 테르세라가 지정되었고, 이를 통해 몇 가지 실험적 사업이 시행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지하수 재활용 시스템의 구축이다. 외부에서 유입되는 물에 의존하지 않고, 마을 내에서 발생하는 생활용수와 우수(雨水)를 정화하여 농업용수로 재사용하는 시스템을 시범 운영 중이다. 이는 도시 인근의 한 NGO가 독일 기술진과 협력하여 도입한 것이며, 일부 농지에서는 실제로 관개에 활용되고 있다. 아직은 소규모지만, 장기적으로는 지역 전체의 관개 체계를 복원할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두 번째는 디지털 농업 실험지로의 전환이다. 기후변화에 강한 작물, 자동화된 수분 공급 시스템, 태양광을 활용한 농기구 등 다양한 첨단 농업 기술이 이곳에서 테스트되고 있으며, 특히 기후 적응형 품종 개발을 위해 대학과의 협력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 실험을 통해 테르세라는 고립된 농촌이 아닌,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선진 농업 실험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세 번째는 생태관광 모델의 개발이다. 테르세라의 고립과 척박함을 오히려 독특한 체험 요소로 바꾸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버려진 건축물의 리모델링과 함께 진행되고 있다. 젊은 예술가들이 이곳에 임시 체류하며 벽화와 조형물을 설치하고, 마을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야외 전시관’으로 꾸미는 중이다. 방문객들은 지역 농산물을 직접 수확하고, 건조한 생태환경을 기반으로 한 탐방로를 걸으며 기후 위기의 현실을 피부로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시도들은 아직 초기 단계이며 수익 구조가 안정적이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테르세라가 단순한 ‘사라지는 도시’가 아니라 ‘변화를 모색하는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점이다.

 

4. 미래를 건조한 땅에 심다: 테르세라의 내일

테르세라의 미래는 단순히 생존을 넘어서, 새로운 도시 모델로서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기후 변화로 인해 전 세계 수많은 지역이 점차 물 부족 문제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테르세라의 경험은 중요한 참고사례가 될 수 있다. 물 부족, 인프라 고립, 경제적 침체라는 삼중고를 겪고 있는 이 도시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유사한 위기에 처한 다른 지역에도 하나의 길을 제시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스페인 정부는 2024년부터 테르세라를 ‘기후 적응형 도시 프로젝트’의 핵심 거점으로 지정하고, 본격적인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주요 추진 방향은 ‘기후 복원력 강화’, ‘디지털 기반 농업 혁신’, ‘공동체 기반 거버넌스’로 요약된다.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시민참여형 행정 시스템의 도입이다. 주민들이 스스로 의제를 발굴하고, 예산을 집행하며, 외부 기관과의 협업을 주도하는 구조가 도입되고 있으며, 이는 점차 자율성과 주인의식을 높이고 있다.

또한, 국제적인 관심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2025년 3월에는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산하 기후 회복력 워킹그룹이 테르세라를 공식 방문하여 지역의 대응 모델을 평가했고, 일부 요소는 다른 개발도상국에도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미래의 테르세라는 과거처럼 번성한 농업 도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실패의 도시가 아니다. 불모의 땅에서 새로운 실험이 계속되고 있고, 그 실험은 단순히 도시를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기후 위기 시대의 도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이 되고 있다.

테르세라는 지금,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미래를 향한 씨앗을 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