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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의 철도 유령도시

by 옥돌v 2025. 4. 10.

태국의 수도 방콕 한복판에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철도 도시가 있다. 한때 활기찼던 철로 주변은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으로 변해버렸고,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 흔적 속에 숨어 있다. 이 글에서는 방콕의 철도 유령도시에 담긴 역사와 현재의 모습, 그리고 앞으로의 가능성까지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방콕의 철도 유령도시
방콕의 철도 유령도시

1. 시작은 도시의 중심에서: 방콕 철도 유령도시의 형성 배경

방콕의 철도 유령도시는 태국 철도 산업의 발전과 함께 등장했으며, 그 중심에는 '후아람퐁 역(Hua Lamphong Station)'과 인근 철도 노동자 마을들이 있었다. 20세기 초반, 태국은 서구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며 철도망을 전국적으로 확장해 나갔다. 방콕은 철도 교통의 중심지로 떠오르며 이곳을 기점으로 수많은 열차가 전국을 누볐다. 특히 후아람퐁 역 주변은 철도 관련 종사자들이 밀집하여 살던 지역으로, 철도 문화의 발상지이자 상징적인 공간으로 기능했다.

이 지역이 유령도시로 불리게 된 데에는 태국의 도시 개발 정책과 교통 인프라의 변화가 깊이 얽혀 있다. 2000년대 이후 방콕은 대규모 재개발과 도시 현대화 계획을 추진하면서, 중심부에 있던 오래된 철도 노선과 역사들은 점차 그 기능을 잃기 시작했다. 후아람퐁 역도 점차적으로 새로운 고속철도 시스템인 방콕-동북부 노선이나 방콕-치앙마이 노선에 밀리며 중심 기능을 상실했다. 정부는 철도 업무의 중심을 반쾌 지역의 '방콕 중앙역(Krung Thep Aphiwat Central Terminal)'으로 옮겼고, 후아람퐁 역과 그 주변은 점차 이용자가 줄어든 채 방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순한 기능 상실만이 이 지역을 유령도시로 만든 것은 아니다. 철도 종사자와 가족들이 오랫동안 정착해 살던 주택단지는 재개발의 손길을 받지 못하고 노후화되었으며, 공공 서비스의 축소로 주민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철도 노선과 함께 형성되었던 상점, 시장, 공동체 시설들은 문을 닫았고, 남겨진 것은 쇠락해가는 건물들과 녹슨 철도 레일뿐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물리적인 공간만이 아니라, 철도 노동자 공동체의 정체성과 기억을 침식시켰다.

방콕 철도 유령도시의 형성은 단순한 기반 시설의 노후화로 인한 문제가 아니라, 정책적 방향과 도시 개발의 우선순위가 어떻게 특정 공동체를 소외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철도는 한 시대의 산업과 국가 발전을 상징했지만, 시대가 바뀌자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으로 여겨졌고, 함께 살았던 사람들과 공간은 조용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 유령도시는 잊힌 철도 시대의 유산인 동시에, 현대화 이면의 그림자를 드러내는 장소다.

 

2. 현재의 모습: 쇠락한 철도와 남겨진 사람들

오늘날 방콕의 철도 유령도시는 외형상으로는 기능을 상실한 철로와 오래된 건물들이 남아 있는 장소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삶을 이어가는 소수의 주민들이 있다. 특히 후아람퐁 역 주변의 철도 마을, 일명 '탈랏 랑 랑퐁(Talat Lang Langphong)' 지역은 대표적인 예다. 이곳은 철도 노동자들의 후손들과 도시 빈곤층이 섞여 사는 곳으로, 공식적으로는 재개발 대상지이지만 아직까지 본격적인 개발은 이뤄지지 않았다.

골목마다 늘어선 목조주택들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고, 일부 건물은 붕괴 직전의 상태에 있다. 철로 위나 그 옆에 형성된 무허가 판자촌은 방콕의 다른 번화한 지역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곳에서 빨래를 널고, 노점상을 운영하고, 어린아이들은 철로 위를 놀이터 삼아 뛰어논다. 기능을 잃은 철로는 이제 주민들의 생활공간이자 공공의 거리로 바뀐 것이다.

이 지역의 문제는 단순한 도시 미관의 문제가 아니다. 방콕시 당국은 탈랏 랑 랑퐁과 그 인근 지역을 대상으로 철거 및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지만, 뚜렷한 대안 없이 진행되는 개발계획은 주민들에게 불안을 안겨준다. 일부 주민들은 보상 없이 강제 이주를 요구받기도 했고, 이에 따라 법적 분쟁이나 저항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고령의 철도 퇴직자들은 이곳을 삶의 마지막 터전으로 여기고 있어, 그들에게 있어 이주는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삶의 근거지를 잃는 것이다.

한편, 이 지역은 철도와 관련된 역사적 유산으로서의 가치도 있다. 후아람퐁 역 자체는 태국 철도의 상징으로, 건축학적으로도 식민지 시대의 흔적을 담고 있으며, 그 주변의 철도 마을은 산업사회 형성기의 생활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산이다. 그러나 이 가치들은 아직까지 도시계획에서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고 있다.

현재의 방콕 철도 유령도시는 쇠락한 공간이면서도 여전히 사람의 삶이 이어지고 있는 '살아 있는 폐허'다. 그 속에서 삶과 유산, 개발과 저항이 교차하며 도시의 미래가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단지 방콕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수많은 도시가 겪고 있는 도시화의 역설적 결과이기도 하다.

 

3. 잊힌 철로의 재발견: 관광 자원과 문화 공간으로서의 가능성

최근 몇 년 사이, 방콕 철도 유령도시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되살아나고 있다. 그 중심에는 도시재생과 문화관광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있다. 특히 인스타그램 등 SNS를 중심으로 '레트로' 열풍이 불면서, 후아람퐁 역과 그 주변 지역의 낡은 풍경은 '힙한 공간'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일부 관광객들은 오히려 이 쇠락한 분위기 속에서 색다른 도시의 매력을 느끼고, 철도와 폐허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여 지역 내에서는 몇몇 예술 프로젝트와 시민단체 주도의 문화활동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방치된 철도차량을 개조한 임시 전시관이나 팝업 갤러리, 거리 예술 공간 등은 낡은 철로를 단순한 폐허가 아닌 새로운 창작 공간으로 변모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도시 건축가들과 학자들은 이 지역이 단순히 철거되어야 할 공간이 아니라, 방콕의 역사적, 사회적 기억을 담은 '도시 유산'으로 보존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유사한 사례는 많다. 일본의 '사이타마 철도 박물관'이나, 독일 베를린의 '글라이스드라이에크 공원(Gleisdreieck Park)'처럼, 폐선 철로를 시민공원이나 문화시설로 바꾸는 시도는 도시 재생의 성공적인 예로 꼽힌다. 방콕 역시 이런 사례를 참고하여, 방콕 철도 유령도시를 시민과 관광객이 모두 즐길 수 있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다만 이러한 재개발은 지역 주민들의 삶을 배제하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도시 재생이란 이름 아래 기존 주민들이 내쫓기고, 상업적 개발로만 흐른다면 또 하나의 ‘젠트리피케이션’ 사례로 전락할 뿐이다. 방콕 철도 유령도시의 재발견은 단지 공간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주민들과 방문객이 공존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4. 방콕 철도 유령도시의 미래: 공존과 기억을 위한 도시 전략

방콕 철도 유령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는 '어떻게 잊힌 공간을 되살리되, 그 속의 사람들과 기억을 보존할 것인가'다. 현재 방콕시가 추진 중인 철도노선 통합 재편과 반쾌 중앙역 중심화 계획은 기존 철도 거점의 기능을 축소시키고 있지만, 동시에 그 주변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아직 명확히 제시되지 않고 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방콕 철도 유령도시는 다음 세 가지 방향으로 발전이 가능하다. 첫째, 역사문화공간으로서의 보존이다. 철도와 관련된 공간은 단지 교통 수단의 일부가 아니라, 도시 형성의 결정적인 동력이자 공동체의 기억이 깃든 장소다. 방콕시는 후아람퐁 역 일대를 문화유산으로 등록하고, 체계적인 보존 및 해설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통해 교육적·관광적 자원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둘째, 기존 주민과의 상생을 전제로 한 도시재생 모델이 필요하다. 단지 외부 투자자 유치를 위한 재개발이 아니라, 주민이 스스로 공간을 개선하고 운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협동조합 방식의 주거지 개선 사업, 커뮤니티 카페나 예술공방 등을 통해 소득을 창출하고, 자립적 거주 환경을 마련할 수 있다.

셋째, 지속가능한 도시 생태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과거 산업 중심의 철도 도시에서, 이제는 걷기 좋은 거리, 녹지와 커뮤니티 중심의 공간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철로를 따라 이어진 보행 네트워크, 자전거 도로, 쉼터 등은 방콕의 고밀도 도시에 새로운 여유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 기후위기 시대에 맞춰 저탄소 도시로의 전환을 도모하는 데에도 이 유령도시는 상징적 공간이 될 수 있다.

결국 방콕 철도 유령도시의 미래는 단순한 철거와 재건축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삶, 미래의 도시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새로운 도시 전략을 필요로 한다. 이는 방콕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도시가 마주한 시대적 질문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철로 위의 유령 도시는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잊혀진 철로를 따라 다시 길을 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