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이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눈에 띄는 아름다움, 역사적 중후함, 혹은 고대 문명의 잔재를 떠올립니다. 피라미드, 만리장성, 콜로세움처럼 눈으로 보기에 압도적이거나, 세계사의 흐름을 뒤바꾼 현장들이 대표적인 이미지죠. 그러나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 목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런 기대를 벗어난 ‘의외의 장소’들이 적지 않게 존재합니다. 얼핏 보면 평범하거나, 심지어 ‘왜 여기가 세계유산이지?’ 싶은 공간도 많습니다. 이 글에서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세계유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는 장소들이 왜 등재되었는지를 중심으로,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진짜 가치와 기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아름답지 않아도’ 세계유산이 될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사례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 가장 대표적인 ‘예상 밖’의 사례로는 폴란드에 위치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가 있습니다.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 독일이 운영한 가장 규모가 큰 유대인 학살 시설이자, 홀로코스트의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외형적으로는 고철 철조망과 붉은 벽돌 건물, 그리고 당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처참한 장소일 뿐입니다. 아름답기는커녕 처연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지배하는 공간이지만, 유네스코는 1979년 이곳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습니다.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유네스코는 세계유산을 단지 ‘보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와 기억을 상기시키는 장소로 정의합니다. 아우슈비츠는 인류가 저지른 가장 끔찍한 범죄 중 하나를 증언하는 장소로,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육하고 기억하는 공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유산의 외형보다 그 안에 담긴 서사와 교훈이 훨씬 중요하게 평가된다는 것입니다. 아우슈비츠가 세계유산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장소가 가진 교훈적 기능과 인류 전체가 공유해야 할 역사적 기억이라는 철학이 있었던 셈입니다.
이는 유네스코가 말하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의 실천 사례이기도 합니다. 아름답지 않아도, 관광지로서 매력적이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반드시 기억하고 반성해야 할 공간이라면, 세계유산으로서의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자연 경관이 아닌 ‘산업현장’도 세계유산이 될 수 있을까?
또 하나의 놀라운 세계유산은 산업혁명과 관련된 장소들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영국의 더비셔 더웬트 계곡(Derwent Valley Mills)입니다. 이곳은 세계 최초의 수력 방적공장이 있었던 곳으로, 18세기 말 산업혁명의 발상지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외견상으로 보면 거대한 공장 건물과 운하, 단조로운 벽돌 구조물들이 전부인 듯 보이지만, 유네스코는 이곳이 인류 문명사에 끼친 영향을 인정해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독일의 포스텔바츠 제철소,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벨기에의 월로니 탄광 지역 등도 모두 산업유산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이런 장소들은 관광 명소나 미적 가치로는 부족해 보일 수 있지만, 산업 기술과 노동의 역사, 그리고 현대 문명으로의 이행 과정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유산으로 평가받습니다.
산업유산의 등재는 단순히 과거의 유물을 기념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는 사회적 전환의 증거이자 기술 진보의 실체, 그리고 노동의 가치를 다시 조명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유네스코는 단지 예술적, 자연적 가치를 넘어 인간의 활동 전반, 특히 문명을 이끌어온 동력으로서의 산업현장을 중요한 유산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계유산이란 ‘아름다운 건축물’이나 ‘자연 절경’만이 아니라, 문명을 이끈 기록과 구조물들도 포함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포괄적입니다. 겉보기에 평범하거나 거칠어 보이는 산업 현장도, 그 속에 인류사의 전환점이 담겨 있다면 세계유산으로서의 자격을 갖는 것입니다.
비물질적 유산의 흔적도 공간으로 보존된다: 루트 경로 세계유산
세계유산의 개념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습니다. 그중 주목할 만한 흐름은 ‘경로 유산(Routes as heritage)’입니다. 이는 특정 장소 하나가 아니라, 인류의 이동과 교류, 무역, 문화 확산을 가능하게 했던 경로 자체를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는 방식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실크로드입니다. 중국과 중앙아시아, 중동, 유럽을 연결했던 이 고대 무역로는 단일한 구조물이나 장소가 아닌, 수천 년간의 교류와 문명 전파를 가능케 한 통로로서의 의미가 인정되어 세계유산이 되었습니다. 실크로드에는 여러 국가의 유산이 공동 등재되었고, 그 경로를 따라 존재하는 도시, 사원, 요새, 시장터 등도 유산 목록에 포함되었습니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산티아고 순례길, 아프리카의 노예 무역 경로, 남미의 잉카 도로망 등도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들은 한 점의 장소가 아닌, 인류가 만든 이동과 소통의 흔적을 공간적으로 보존한 사례입니다.
이러한 경로 유산의 등장은 유네스코가 장소의 ‘정체성’을 재해석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더 이상 고정된 구조물만이 유산이 아니며, 인간의 움직임, 교류, 사상의 흐름 같은 무형의 가치가 구체적인 장소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이처럼 유네스코는 점차적으로 유산의 형태보다는 그 속의 의미를 중심으로 세계유산을 판단하고 있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유산의 틀’을 꾸준히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문화 유산 아닌 자연의 힘, ‘기후’도 세계유산이 될 수 있을까?
세계유산 중 또 하나 흥미로운 분류는 자연유산입니다. 자연유산은 대개 독특한 생태계나 지질학적 특성을 기준으로 지정되지만, 때로는 우리가 ‘그 자체로 유산이 될까?’ 싶은 자연 현상도 포함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와타라나 국립공원(오스트레일리아)입니다. 이곳은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이 중첩된 ‘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수만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원주민의 문화와 자연환경이 결합된 살아 있는 생태 공간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또한 캐나다의 로키산맥 공원군,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 제도, 탄자니아의 응고롱고로 분화구처럼, 인간의 흔적보다는 지구의 진화, 생명의 다양성, 지질학적 생성 과정이 주요 가치로 인정된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자연 자체’가 아니라, 그 자연이 인류 전체가 공유해야 할 과학적, 생태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흥미롭게도 유네스코는 최근 기후변화의 증거가 되는 자연 공간을 유산으로 보호하는 데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예컨대 스위스의 알프스 빙하, 남극의 해양 생태계, 몰디브의 산호초 등은 단지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기후변화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지구의 경고장으로서 가치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유네스코가 점차 ‘세계유산’을 인류 문화만이 아니라 지구 공동의 책임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세계유산은 이제 더 이상 과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경고이자 미래의 선택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