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이라는 이름 아래 유네스코는 전 세계의 문화와 자연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지속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항상 순탄한 길만은 아니었습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순간 해당 장소에는 다양한 기대와 규제가 동시에 쏟아지며, 지역 사회와 국제 사회 사이에 충돌과 딜레마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계유산은 단순한 명예가 아니라 보존과 개발 사이에서의 선택을 요구하는 일종의 선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이 선택이 지역 주민의 생계를 위협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치적인 도구로 변질되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보존이라는 이름 아래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만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안고 있는 보존과 파괴 사이의 갈등, 즉 세계유산 지정이 가져오는 딜레마를 다양한 실제 사례를 통해 조명해보려 합니다.
세계유산 지정이 개발을 가로막을 때: ‘보존’이라는 족쇄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 해당 지역은 국제적인 보호를 받게 됩니다. 이는 훌륭한 제도이지만, 동시에 개발을 제한하는 규제가 따라붙는다는 점에서 지역 사회에는 큰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독일 드레스덴 엘베 계곡입니다. 이곳은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역사적인 건축물이 어우러진 지역으로,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드레스덴 시는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엘베강을 가로지르는 교량 건설을 계획했고, 이는 유네스코의 보존 원칙과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유네스코는 교량 건설이 경관을 훼손하고 유산의 본질적 가치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거듭 경고했고, 결국 2009년에는 이례적으로 드레스덴 엘베 계곡을 세계유산 목록에서 삭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이었으며, 세계유산 등재가 무조건적인 명예가 아니라 ‘조건부의 약속’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이 사례는 보존과 개발 사이의 갈등이 단순한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지역의 경제, 교통, 생활 환경과 직결된 현실적인 문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특히 개발도상국이나 재정이 열악한 지역에서는 세계유산 등재로 인해 관광 수입은커녕 발전이 가로막힌다는 인식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유네스코의 취지와 지역 사회 간의 괴리를 심화시키며, 세계유산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주민의 삶과 충돌하는 세계유산, 보호의 이름 아래의 희생
세계유산의 또 다른 딜레마는 현지 주민의 삶과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 해당 지역에는 문화재 보호를 위한 각종 규제가 적용되고, 이로 인해 주민들의 생활 방식이 제약되거나, 심한 경우 강제 이주까지 발생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도의 카즈랑가 국립공원입니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도 코뿔소가 서식하는 생태계로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지만, 그 보호 조치로 인해 인근의 원주민들은 사냥 금지, 농경지 제한, 거주지 철거 등의 조치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보호 구역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민간인들이 사살되는 일까지 발생해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세계유산이 자연과 동물을 보호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인간의 삶을 외면했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입니다.
또한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지 역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곳은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대표적인 세계유산이지만, 유산 보호를 이유로 유적지 근처 주민들이 이주를 강요당하고, 농지 사용과 건축 행위가 제한되며, 지역 경제가 관광 산업에 종속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 결과 주민들은 자신의 터전을 빼앗긴 채 관광객을 위한 배경으로 전락했다는 불만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계유산 보호라는 대의명분 아래 현지 주민의 삶, 문화적 자율성, 경제 활동이 위협받는다면, 그 유산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 모두의 자산’이라 부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유네스코와 각국 정부가 보존 정책을 수립할 때는, 문화와 자연뿐만 아니라 사람 중심의 접근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유산이냐 정치도구냐: 세계유산을 둘러싼 국제 갈등
세계유산 지정은 본래 문화와 자연의 가치를 보존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지만, 때로는 국가 간의 외교적 갈등이나 정치적 대립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유네스코는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려 노력하지만, 유산의 소유권, 역사 해석, 명칭 문제 등에서 각국의 민감한 입장이 충돌하면서 복잡한 갈등이 발생합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동아시아의 문화재 논쟁이 있습니다. 중국은 2015년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의 세계유산 등재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이 유산들 가운데 일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노역 현장으로 사용되었던 곳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해당 유산이 산업 근대화의 상징이라고 주장한 반면, 중국과 한국은 그 장소에서 자국민이 강제로 동원되었다는 점을 부각시키며 피해자에 대한 언급과 사과 없는 등재는 부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논란은 유네스코가 단순한 문화보존 기관이 아닌, 역사 해석의 장이 되고 있다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또 다른 예로는 중동의 예루살렘 구시가지가 있습니다. 이곳은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모두 성지로 여기는 곳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 모두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는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팔레스타인 영토에 위치한 세계유산’으로 지정했지만, 이 결정은 이스라엘 정부의 거센 반발과 유네스코 탈퇴 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세계유산 등재가 정치적 이해관계, 민족 감정, 외교 전략에 따라 이용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드러냅니다. 결국 유네스코는 과연 누구의 시각으로 유산을 정의하고 보존할 것인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관광객의 범람이 가져온 또 다른 파괴, 보존의 역설
세계유산 등재는 종종 해당 지역의 관광 산업 활성화를 불러오고, 이는 지역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과도한 관광은 유산의 물리적 파괴, 생태계 훼손, 지역 공동체 붕괴 등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며, ‘보존’이라는 목적을 오히려 해치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 도시 중 하나로, 1987년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몰려드는 관광객과 대형 유람선, 개발 압력으로 인해 도시의 기반이 약화되고, 일상 생활을 유지하던 주민들이 떠나는 일이 속출했습니다. 2023년에는 유네스코가 베네치아를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올릴 것을 권고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시 당국은 하루 관광객 수 제한, 대형 유람선 진입 금지, 입장료 부과 등의 조치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페루의 마추픽추, 태국의 아유타야, 이탈리아의 피렌체 등도 비슷한 관광 과잉으로 인해 유산 보호에 비상이 걸린 상태입니다. 이들은 관광으로 인해 경제적 수익은 얻었지만, 유산 자체의 가치와 원형이 손상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유산이 ‘보존’이라는 명목 아래 실제로는 상업화와 상품화로 이어지는 구조적 모순을 드러냅니다. 관광 수요와 보존 목적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이 없다면, 결국 유네스코의 이상은 현실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