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조선 후기 종로, 서울의 원조 핫플레이스였다고요?

by 옥돌v 2025. 6. 23.

서울을 대표하는 거리 ‘종로’는 오늘날에도 유동인구가 많은 중심지로, 역사와 현대가 공존하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종로의 '핫플레이스'로서의 역사는 단지 최근 몇십 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놀랍게도 조선 후기부터 이미 종로는 활기찬 상업, 정보 교류, 문화 생활의 중심지로 기능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조선 후기 종로 거리의 사회적, 문화적 의미와 구체적으로 어떤 시설과 활동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며, 그 당시 ‘서울의 원조 핫플’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되짚어보고자 합니다.

 

조선 후기 종로, 서울의 원조 핫플레이스였다고요?
조선 후기 종로, 서울의 원조 핫플레이스였다고요?

 

상업과 유통의 중심지, 조선 후기 종로의 시장 문화

종로는 조선 왕조가 한양(서울)을 건설하면서 중앙의 거리로 기획된 곳입니다. 광화문과 동대문을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해 자연스럽게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곳이 되었고, 이로 인해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졌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 경제 활동이 확대되면서 종로 일대는 서울 최고의 상업지구로 성장했습니다. 종로에는 다양한 종류의 점포와 노점이 밀집되어 있었고, 도성 밖에서 유입되는 물자들이 종로를 중심으로 거래되었습니다. 비단, 면직물, 도자기, 한약재, 철물 등 각종 생활 필수품은 물론, 서책과 종이 같은 지식 상품도 유통되었습니다.

또한 '육의전(六矣廛)'이라 불리는 관영 상점들도 종로 거리의 핵심적 존재였습니다. 육의전은 국가가 공인한 여섯 가지 큰 상점 종류로, 포목전, 면주전, 어물전, 미곡전, 종이전, 모전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국가의 물자 공급을 담당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민간 상인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사설 상점과 노점상도 함께 증가했습니다. 이들 민간 상인들은 종로를 중심으로 ‘난전(亂廛)’이라 불릴 만큼 비공식 유통망을 구축했으며, 이를 둘러싼 갈등과 협상이 이어졌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도시 경제의 자율화 흐름을 상징하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종로의 시장은 단순한 물품 거래의 장을 넘어, 지역 사회의 정보를 공유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대형 쇼핑몰이나 복합문화공간이 수행하는 역할을, 그 당시에는 종로의 골목골목에서 자연스럽게 구현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정보 유통과 문화 소비의 중심, ‘책방 골목’과 글판 문화

조선 후기 종로는 단순한 상업지구를 넘어, 지식과 정보가 유통되는 핵심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이곳에는 수많은 책방과 필사방이 몰려 있어 당시 유학자, 지식인, 서민들 사이에서 책을 사고 읽고 베끼는 문화가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종로 인근에는 ‘서적방(書籍坊)’이라 불리는 책판 거리들이 존재했으며, 오늘날의 교보문고나 중고서점 거리에 해당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필사본, 목판본, 방각본 등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거래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문예와 실학의 대중화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책의 수요는 폭증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방들이 단순히 판매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 공간을 제공하거나 필사 대행, 출판까지 수행하는 종합적 문화공간이었다는 점입니다. 일부 필사방에서는 유명한 문인들이 자주 드나들며 문집을 나누고 담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종로의 서적상은 단순한 책 장수가 아니라, 당시 시대정신과 사상 흐름을 전달하는 매개자였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요소는 ‘글판’ 문화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광고판이나 게시판과 같은 형태로, 종로 거리에 설치된 글판을 통해 새로운 시책, 관공서 공고, 사설 풍자글, 소설 연재 등이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 글판을 통해 사람들은 일종의 ‘거리 신문’을 접할 수 있었고, 인기 있는 이야기글은 계속 필사되어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종로는 책을 통한 지식의 유통뿐 아니라, 구술과 필사를 통한 정보 전달이 이뤄지던 당대의 ‘SNS 공간’이었으며, 지금으로 치면 온라인 커뮤니티와 오프라인 북카페의 결합체와도 같은 복합 기능을 수행했던 셈입니다.

 

여가와 오락의 중심, 종로의 다방과 주막 문화

조선 후기 종로는 단순한 경제와 지식의 허브를 넘어, 사람들의 여가와 오락 문화가 집중된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다방(茶房)'과 '주막'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소통하고 문화를 소비하는 장소로 기능했습니다.

‘다방’은 오늘날의 카페와 비슷한 공간으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양반 지식인 계층은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시문을 교류하거나 정치, 철학적 사상을 논하곤 했습니다. 또 다방에는 서생이나 중인 계층도 자주 드나들며 인맥을 넓히고 정보를 교환하는 장이 되었습니다. 일부 다방은 주인의 안목과 성향에 따라 문예 중심, 서화 중심으로 분위기를 달리했고, 일종의 살롱 문화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주막’은 서민과 상인들의 오아시스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종로 주변의 주막에서는 하루 장사를 마친 이들이 모여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했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노래, 풍물놀이 같은 민속 오락이 함께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때로는 유랑 예인(藝人)들이 주막에 들러 판소리나 탈춤 등을 공연하기도 했는데, 이는 종로 거리 전체를 일종의 공연 무대로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종로는 양반부터 서민, 예인까지 모두가 자신의 방식으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조선 후기의 여가 문화는 오늘날처럼 고도로 세분화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종로는 다양한 문화적 수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종로는 단지 경제적 기능만이 아니라, 조선 후기 서울 사람들의 정서적 안식처이자 사회적 교류의 장으로 기능했습니다.

 

정치와 민심의 만남, 종로 거리의 집회와 여론

조선 후기 종로 거리는 때로는 민중의 분노가 표출되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궁궐과 가까운 위치, 유동인구의 집중, 정보 유통의 중심이라는 조건은 종로를 자연스럽게 정치적 긴장이 형성되는 장소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민란, 환곡 폐단, 세도정치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던 19세기 후반, 종로 거리에서는 자발적인 항의, 시위, 소문 확산이 매우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종로 3가, 4가 인근에는 ‘만민공동회’나 ‘유생시위’와 같은 형태로 군중이 모여 여론을 형성하고, 목소리를 낸 전례가 다수 존재합니다.

또한 암행어사나 지방 관리들이 올라올 때 종로에서 민심을 살피고 사건을 조사하는 일도 많았고, 고을별 소식이 올라와 전해지는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종로 거리에 있던 '종루(鐘樓)'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조선 시대 보신각의 일종으로,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려 퍼지는 장소였습니다. 종소리는 단순한 시간 알림이 아니라, 조정의 권위를 상징하며 민심을 통제하는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갑오개혁 이후에는 종로 일대에 일본 공사관이 들어서는 등 외세의 압박이 본격화되면서 종로는 국제 정세의 갈등이 고조되는 공간으로 변모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은 단순한 번화가를 넘어, 조선 후기 종로가 ‘시민사회’의 탄생과 궤를 함께하는 공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종로는 서울의 대표적인 전통 중심지로 여겨지며, 문화유산과 현대 상업시설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종로는 단순한 행정적 중심지를 넘어, 상업, 정보, 여가, 정치 등 다양한 사회 기능이 결합된 복합 도시공간이었습니다.

당시 종로 거리에는 책방, 시장, 다방, 주막, 정보판, 종루 등이 어우러져 있었고, 양반에서 상인, 서민, 예인까지 다양한 계층의 삶이 이곳에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종로는 말 그대로 ‘서울의 원조 핫플레이스’였으며,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도시 문화의 원형이 이곳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도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문화적 연결고리로서 종로의 가치는 지금도 유효합니다.